윤석열 내란 사건 형량이 전두환 내란 사건보다 높다.

분석 완료

사건 개요

2026년 9월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12·3 비상계엄에 가담하여 내란 혐의로 기소된 주요 군 지휘관 5명에게 징역 9년에서 18년을 선고하였다. 이로써 윤석열 전 대통령과 국무위원, 군·경 지휘부 등 내란 사건 주요 피고인들에 대한 1심 선고가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12.3 계엄에 참여한 군 지휘관들에게 중형이 선고되었다. (출처: MBC)

12·3 비상계엄 사건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내란 사건에 대한 유죄판결 이후 약 30년 만에 주요 국가권력 담당자들에게 내란죄로 유죄판결이 선고된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군을 동원하여 헌정질서를 침해하였다. 12·3 비상계엄 사건에서는 현직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과 경찰을 동원한 반면, 5·18 내란에서는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에 이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군을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법원은 두 사건 모두 내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였다. 두 사건에서 주요 피고인들에게 선고된 형량을 비교하고, 내란의 지속기간과 군 동원 규모, 발생한 피해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장 분석

이 주장은 12·3 비상계엄 사건과 과거 5·18 내란 사건 1심에서 내란우두머리와 내란중요임무종사자들에게 선고된 형량을 비교하는 것이다.

두 사건의 형량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심급에서 유사한 지위와 역할을 담당한 피고인들의 형량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형량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두 사건의 범행 규모와 결과도 함께 비교한다.

이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검증한다.

1. 12·3 내란죄와 5·18 내란죄의 1심 형량은 어떠한가?

2. 두 내란은 각각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가?

3. 두 내란에 동원된 군 병력의 규모는 각각 어느 정도였는가?

4. 두 내란으로 각각 어떠한 피해가 발생하였는가?

5. 법원은 두 사건에서 각각 어떠한 사정을 고려하여 형량을 정하였는가?


사실 검증

사실 검증 1

12·3 내란죄와 5·18 내란죄의 1심 형량은 어떠한가?

형법 제87조는 대한민국 영토의 전부 또는 일부에서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행위를 내란죄로 규정하고 있다.

내란에 가담한 사람의 역할에 따라 법정형은 크게 달라진다. 우두머리는 사형·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사람은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부화수행하거나 단순히 폭동에 관여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12·3 내란 사건

12·3 내란 사건에서 내란우두머리로 기소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내란중요임무종사자들에게도 중형이 선고되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 징역 30년,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에게 징역 25년, 한덕수 전 국무총리에게 징역 23년이 선고되었고,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에게 각각 징역 18년,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그 밖에도 징역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내란중요임무종사자가 다수였다.

1심에서 내란우두머리 또는 내란중요임무종사죄가 인정된 피고인 가운데 형량이 높은 주요 피고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피고인 죄명 당시 직위 1심 선고형 1심 이후
윤석열 내란우두머리 외 대통령 무기징역 항소심 계속 중
김용현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국방부 장관 징역 30년 항소심 계속 중
박성재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법무부 장관 징역 25년 항소심 계속 중
한덕수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국무총리 징역 23년 항소심 징역 15년
노상원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전 정보사령관 징역 18년 항소심 계속 중
여인형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방첩사령관 징역 18년 항소심 계속 중
이진우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수도방위사령관 징역 15년 항소심 계속 중
조지호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경찰청장 징역 12년 항소심 계속 중
문상호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정보사령관 징역 12년 항소심 계속 중
김현태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707특수임무단장 징역 12년 항소심 계속 중
박안수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계엄사령관 징역 10년 항소심 계속 중
김봉식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서울경찰청장 징역 10년 항소심 계속 중
이상현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제1공수특전여단장 징역 10년 항소심 계속 중
곽종근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특수전사령관 징역 9년 항소심 계속 중

5·18 내란 사건

1996년 1심 재판은 1979년 12·12 군사반란부터 1980년 5·17·5·18 내란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을 함께 심리하였다. 피고인에 따라 군사반란, 내란, 내란목적살인, 불법진퇴, 상관살해 등 여러 범죄가 함께 적용되었으며,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뇌물죄도 병합되었다. 아래의 선고형은 5·18 내란죄에 대해서만 선고된 것이 아니라, 12·12 군사반란과 5·17·5·18 내란 등 각 피고인에게 인정된 여러 범죄를 종합하여 선고한 형량이다.

내란수괴(현행 ‘내란우두머리’)인 전두환에게는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내란중요임무종사자인 노태우에게는 징역 22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그 밖의 내란중요임무종사자 가운데 황영시·정호용·허화평·이학봉에게 각각 징역 10년, 이희성·허삼수에게 각각 징역 8년, 주영복에게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 내란모의참여죄가 인정된 차규헌에게는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

비교를 위해 위와 같은 기준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피고인 죄명 당시 직위 1심 선고형 1심 이후 확정형
전두환 내란수괴 외 보안사령관·합수본부장 사형 무기징역
노태우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수도경비사령관 징역 22년 6개월 징역 17년
황영시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육군참모차장 징역 10년 징역 8년
정호용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특전사령관 징역 10년 징역 7년
허화평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보안사 비서실장 징역 10년 징역 8년
이학봉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합수본 수사1국장 징역 10년 징역 8년
이희성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계엄사령관 징역 8년 징역 7년
허삼수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보안사 인사처장 징역 8년 징역 6년
주영복 내란중요임무종사 외 국방부 장관 징역 7년 징역 7년

두 사건의 비교

내란우두머리의 1심 선고형은 5·18 내란 사건이 더 높았다. 전두환에게는 사형이 선고된 반면 윤석열에게는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내란중요임무종사자들의 1심 선고형은 12·3 내란 사건에서 더 높게 나타났다. 5·18 내란 사건에서는 노태우의 징역 22년 6개월을 제외하면 그 밖의 내란중요임무종사자들의 1심 선고형이 모두 징역 10년 이하였다.

반면 12·3 내란 사건에서는 김용현 30년, 박성재 25년, 한덕수 23년, 여인형 18년, 이진우 15년 등 징역 10년을 초과하는 형을 선고받은 내란중요임무종사자가 다수였다.

두 사건의 선고형을 구성하는 범죄에는 차이가 있다. 윤석열 내란 사건에서는 내란죄가 중심인 반면, 전두환 내란 사건에서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에 따른 군형법상 반란죄와 형법상 내란죄 등 각 피고인에게 인정된 여러 범죄를 종합하여 하나의 형이 선고되었다.

전체 기소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12·12 군사반란·5·18 내란 사건에서는 특별수사본부가 1996년 2월 수사를 마무리하고 전두환·노태우 등 16명을 기소하였다. 12·3 비상계엄 사건에서는 조은석 내란특검팀이 2025년 12월까지 180일간 수사하여 군검찰이 기소한 사건을 포함해 총 27명을 기소하였다. 이후 권창영 종합특검팀도 2026년 8월까지 180일간 수사하여 총 58명을 기소하였다. 다만 종합특검의 기소 대상에는 12·3 내란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건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두 특검의 기소 인원을 합산하여 12·3 내란 사건의 기소 규모로 볼 수는 없다.

결론 (근거 수준: 강)
내란우두머리의 1심 선고형은 5·18 내란 사건이 더 높았지만, 내란중요임무종사자들의 1심 선고형은 12·3 내란 사건에서 전반적으로 더 높게 나타났다.

사실 검증 2

두 내란은 각각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는가?

12·3 내란과 5·18 내란은 사건이 진행된 기간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5·18 내란’이란 12·12 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 등을 거쳐 국가권력을 장악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12·3 내란 사건

윤석열 전 대통령은 2024년 12월 3일 오후 10시 28분경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국회는 이튿날 오전 1시 1분경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하였고, 윤 전 대통령은 오전 4시 20분대 계엄 해제를 발표했다. 이어 국무회의가 오전 4시 30분  비상계엄 해제안을 의결하였다. 비상계엄의 선포부터 해제까지는 약 6시간이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 (출처: 연합뉴스)

비상계엄의 지속기간과 내란죄의 법적 지속기간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내란특검은 12·3 내란의 종료 시점을 2024년 12월 4일 비상계엄 해제가 공표된 때로 보고 수사·공소제기 및 공소유지를 해왔다. 반면 종합특검은 계엄 해제 이후에도 내란으로 인한 위험이 계속되었다고 보고,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12월 14일을 종료 시점으로 판단하였다.

5·18 내란 사건

대법원은 1997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피고인들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군 지휘권을 장악한 뒤, 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의사당 점거·폐쇄, 계엄군 배치, 광주시위 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운영, 정치활동 규제 등을 계속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5·18 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는 모습 (출처: 5·18기념재단)

대법원은 법률상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을 구별하였다. 12·12는 군형법상 군사반란이고, 형법상 내란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자체가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하고 그 폭동적·협박적 효력은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보아, 일련의 내란행위는 비상계엄이 해제된 1981년 1월 24일 종료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법률상 5·18 내란의 기간은 1980년 5월 17일부터 1981년 1월 24일까지 약 8개월이다.

이 글에서는 형량 비교를 위해 12·12 군사반란부터 5·18 내란에 이르는 전체 국헌문란 과정을 비교 대상으로 삼으므로, 그 기간은 1979년 12월 12일부터 1981년 1월 24일까지 약 13개월이다.

결론 (근거 수준: 강)
12·3 내란은 내란특검의 종료 시점(12월 4일)을 따르면 약 6시간, 종합특검의 종료 시점(12월 14일)을 따르면 약 11일 동안 진행되었다. 5·18 내란은 법률상 약 8개월간 지속되었으며, 12·12 군사반란부터 5·18 내란에 이르는 국헌문란 과정은 약 13개월간 지속되었다.

사실 검증 3

두 내란에 동원된 군 병력의 규모는 각각 어느 정도였는가?

두 사건에는 모두 군 병력이 동원되었지만, 그 규모와 범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12·3 내란 사건

국방부가 2026년 2월 12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 총 1,600여 명의 군 병력이 동원되었다.

국회와 더불어민주당 당사에는 수도방위사령부와 특수전사령부 등을 중심으로 857명이 출동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정보사령부·방첩사령부·특수전사령부 등 656명이 출동했다. 정치인 등 주요 인사 체포조에는 방첩사령부와 국방부 조사본부 등 63명이 동원되었고, 계엄사령부 구성에도 육군본부 등의 병력이 관여하였다.

부대별로는 국회 및 민주당사 출동 병력이 수방사 1경비단(136명)·군사경찰단(75명), 특전사 707특임단(197명)·항공단(49명)·1공수여단(400명)이었고, 선관위에는 정보사·방첩사·특전사 3공수여단 등 650여 명이 투입되었다.

5·18 내란 사건

여기서는 5·18 민주화운동 진압 병력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는 2018년 조사 결과에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에 약 2만 명의 군인이 동원되었다고 밝혔다. 당시 광주에는 공수부대를 비롯한 육군 병력뿐 아니라 육군 헬기와 공군, 해군·해병대까지 진압작전에 관여하였다.

특히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등을 재진압하는 최종 작전에는 공수부대 3개 여단과 정규사단 2개 등 약 7,300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편성 병력은 47개 대대 2만 여명).

이 수치에는 그에 앞선 12·12 군사반란에 동원된 병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12·12 군사반란 당시에는 노태우 9사단장의 지시로 29연대 1개 연대 병력이 중앙청에 진주했고, 여기에 1·3·5공수여단과 30·33경비단 등 수도권 주둔 부대가 가세했다.

이 단계의 병력 규모는 위 5·18특별조사위원회 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별도 공식 총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결론 (근거 수준: 강)
12·3 내란에는 1,600여 명의 군 병력이 동원되었다. 5·18 내란에서는 5·18 민주화운동 진압에만 약 2만 명의 군 병력이 동원되었다. 여기에 12·12 군사반란에 동원된 병력은 포함되지 않는다.
관련 자료

사실 검증 4

두 내란으로 각각 어떠한 피해가 발생하였는가?

두 사건 모두 1심 법원은 국헌문란의 목적과 폭동이라는 내란죄의 구성요건이 충족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헌정질서가 침해되었다는 점에서는 두 사건이 동일하다.

헌정질서의 침해 정도를 추상적으로 비교하여 어느 쪽의 피해가 더 크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내란 과정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망·부상 등 구체적인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살펴본다.

12·3 내란 사건

12·3 비상계엄 당시 출동부대에는 소총·권총 등 화기와 실탄이 반출되었으나, 실제 실탄 발포는 없었고 이로 인한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부상자는 발생하였다. 국회사무처는 계엄 사태로 사무처 직원 10여 명이 찰과상, 손가락 염좌, 발가락 열상, 늑골 골절 등의 부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일부 국회의원과 의원 보좌진도 부상을 입었다. 박찬대 원내대표는 얼굴과 발가락을 다쳤으며, 임광현 의원은 국회 출입을 통제하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손가락이 부러졌다.

물적 피해로는 계엄군의 국회 본청 진입 과정에서 유리창·출입문·집기 등이 파손되었다. 국회사무처는 이 피해 규모를 2024년 12월 9일 당시 김민기 국회사무총장 발언을 기준으로 약 6,600만 원으로 집계했다.

5·18 내란 사건

5·18 내란 과정에서 가장 큰 인명 피해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엄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4년간의 조사를 마치고 2024년 2월 말 발표한 보고서에서 민간인 피해 규모를 사망 166명, 행방불명 179명, 부상 2,617명으로 공식 확인하였다.

조사위는 사망자 10명 중 8명이 총상으로 사망했고 10명 중 7명이 10~20대 청소년·청년층이었다고 밝혔다. 부상자는 진압 첫날인 5월 18일에 442명, 5월 20일까지 사흘간 1,227명이 발생하였다.

이 밖에 조사위는 광주·전남 지역에서 계엄군이 최소 20곳 이상에서 50여 차례 발포한 사실, 계엄군의 헬기 사격, 성폭력 피해, 암매장 의혹 등을 조사발표하였다.

한편, 계엄군 측도 피해가 있었다. 계엄군 사망자는 23명, 군경을 합친 사망자는 27명으로 집계된다.

결론 (근거 수준: 강)
두 사건 모두 헌정질서를 침해한 내란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12·3 내란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나, 5·18 내란 과정에서는 민간인 166명과 계엄군 23명이 사망하였다.

사실 검증 5

법원은 두 사건에서 각각 어떠한 사정을 고려하여 형량을 정하였는가?

법원은 내란죄 자체의 중대성뿐 아니라 각 피고인의 지위와 역할, 사전 모의·준비 정도, 구체적인 실행행위, 병력 동원과 지시 내용, 위법한 명령의 실행 또는 거부 여부, 범행 이후의 태도 등을 개별적으로 고려하여 형량을 정하였다.

12·3 내란 사건

12·3 내란 사건의 재판부들은 내란이 성공하지 못하고 사망 등 중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정을 양형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하여 서로 다른 판단을 하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

재판부는 윤석열 전 대통령(무기징역)에 대하여 비상계엄의 지속시간이 비교적 짧았고, 군·경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물리적 사용을 최대한 자제한 것 등을 유리한 정상으로 인정하였다. 다만 계획이나 지시가 이행되지 않았거나 국회 기능 정지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사정 등은 내란범이 위험범이라는 점에 비추어 제한적으로만 고려한다고 밝혔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징역 30년)에 대해서는 비상계엄과 포고령을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계엄 선포 이전부터 국회·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에 군을 출동시키는 방안을 마련했으며, 국회에 군을 투입하여 국회의 의결을 방해하려 한 점 등을 불리한 사정으로 고려하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33부(재판장 이진관)

재판부는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징역 25년)에 대한 양형에서 12·3 내란을 국민이 선출한 권력자와 그 추종 세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내란’, ‘친위 쿠데타’로 평가하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 자체를 흔드는 중대한 행위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고 내란이 몇 시간 만에 종료된 것도 가담자들의 자제 때문이 아니라 시민과 국회의원,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이행한 군인과 경찰의 행동에 따른 것이므로 형을 정할 때 깊이 고려할 사정이 아니라고 보았다.

한덕수 전 국무총리(징역 23년)에 대해서는 국무총리로서 헌법을 수호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고 내란에 가담한 점을 무겁게 평가하였다. 또한 범행 이후 관련 문건을 은닉하고 허위공문서를 작성·폐기하거나 헌법재판소에서 위증하는 등 진실을 은폐하려 한 행위도 불리한 정상으로 고려하였다.

재판부는 한덕수가 사전에 내란을 모의하거나 실행행위를 지휘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볼 자료가 없고, 국회의 비상계엄 해제 요구 이후 계엄 해제에 관여한 점 등을 유리한 사정으로 인정하였지만,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위로부터의 내란’에 대해서는 엄한 처벌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6부(재판장 이현경)

군 지휘관들에 대해서는 군의 정치적 중립성과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이 강조되었다. 재판부는 이들이 특정 세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군사력을 사용했으며, 위법한 지시로 동원된 군인과 경찰관들이 내란 세력의 동조자라는 불명예와 수사·재판의 부담을 지게 되었고, 상관 명령의 적법성과 정당성에 대한 군 내부의 신뢰까지 훼손되었다는 점을 불리한 정상으로 고려하였다.

여인형 전 국군방첩사령관(징역 18년)에 대해서는 윤석열·김용현과 여러 차례 만나 비상계엄의 이유와 목적을 듣고 위법성을 인식하면서도 장기간 구체적인 내용을 메모하며 준비하고, 계엄 선포 후에는 주요 정치인 등의 체포·구금과 선관위 서버 확보 등을 지시하여 내란 실행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지시가 실제 실행되지 않은 것은 부대원들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이나 시민의 저항 때문이지 여인형의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므로 이를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징역 15년)에 대해서는 비상계엄의 목적과 위법성을 인식하면서도 사전에 병력 투입을 준비하고, 계엄 선포 직후 국회를 봉쇄하며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부하에게 전달한 점을 불리하게 평가하였다. 또한 자신의 행위를 부인하며 부하에게 책임을 전가한 점도 고려하였다. 반면 병력에 비무장을 지시하고 실제 물리력 행사가 없었던 점은 내란범이 위험범이라는 이유로 제한적으로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하였다.

5·18 내란 사건

1996년 1심 법원 역시 피고인들의 직책뿐 아니라 12·12 군사반란과 5·17·5·18 내란 과정에서 모의에 참여한 시기, 병력 동원 여부, 구체적인 실행행위와 가담 정도 등을 구분하여 양형에 반영하였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등에 관한 사건은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에서 병합심리되어 1996년 8월 26일 함께 선고되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전두환(사형)에 대해서는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군 내부의 영향력을 이용해 12·12 군사반란과 5·17·5·18 내란을 주도하여 군의 질서와 헌법질서를 파괴한 점을 무겁게 평가하였다. 특히 군 병력을 동원해 헌법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과정에서 발포하도록 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장기간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남겼으며, 무력으로 군과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대통령이 되어 국민에게 법질서에 대한 무력감과 좌절감을 주었다는 점을 불리하게 고려하였다.

노태우(징역 22년 6개월)에 대해서는 전두환과 12·12 초기부터 범행을 모의하고 계획을 수립했으며, 12·12와 5·17의 실행 과정에서 직접 병력을 동원하는 등 ‘2인자’로 적극 가담한 점을 불리하게 평가하였다. 거액의 뇌물수수죄 등 병합된 범죄도 고려하였다. 다만 국민의 직접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북방외교와 유엔 가입 등의 업적을 남긴 점 등을 참작하였다.

황영시와 정호용

황영시(징역 10년)에 대해서는 군 고위 장성으로서 12·12 군사반란에 적극 가담하고 5·17 내란의 논의부터 결정까지 깊이 관여한 점을 무겁게 평가하였다. 특히 12·12 당시 직접 병력을 동원하고 5·17에서는 강경진압 입장을 고수하며 작전 지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점을 불리하게 고려하였다.

정호용(징역 10년)에 대해서는 5·17 모의의 초기부터 깊이 관여하고, 특전사령관으로서 광주 시위 진압에 공수부대를 동원했으며, 광주 현지에서 부대장에게 조언하고 작전에 필요한 장비를 조달하는 등 5·17·5·18 내란에 적극 가담한 점을 양형에 고려하였다.

그 밖의 주요 피고인들

허화평(징역 10년)·허삼수(징역 8년)·이학봉(징역 10년)에 대해서는 전두환의 핵심 참모로서 초기 모의와 계획 수립에 깊이 관여한 점을 불리하게 평가하였다. 특히 허화평은 핵심 연락과 내부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허삼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과 공직자 숙정에 관여했으며, 이학봉은 정승화 수사와 정치인·학생 등의 체포·조사를 지휘한 점을 고려하였다. 다만 허삼수는 실행행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점을 참작하였다.

반면 이희성(징역 8년)과 주영복(징역 7년)에 대해서는 계엄사령관과 국방부 장관이라는 고위공직자로서 5·17·5·18 내란에 가담하고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점을 불리하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초기 모의에서 배제되었다가 실행 단계에 이르러 가담하였고, 주도적 위치에 있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직책상 다소 수동적으로 관여한 점을 유리한 정상으로 고려하였다.

두 사건의 비교

5·18 사건에서는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점과 군사반란 및 내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점이 무겁게 평가되었다. 다만 피고인별로 초기 모의 참여 여부와 직접적인 병력 동원 여부, 실행 과정에서의 역할 등을 구분하였으며, 전두환·노태우에게는 병합된 뇌물수수죄 등도 양형에 반영되었다.

12·3 사건에서는 내란이 단시간에 종료되고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사정을 양형에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하여 재판부마다 차이가 있었다.

이진관 재판부는 이러한 결과가 가담자들의 자제 때문이 아니라 시민과 국회의원, 위법한 명령을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이행한 군인과 경찰의 행동에 따른 것이므로 깊이 고려할 사정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12·3 내란을 국민이 선출한 권력자와 그 추종 세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내란’으로 평가하였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자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내란행위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 자체를 흔들기 때문에, 그 위험성은 ‘아래로부터의 내란’과 비교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대한민국의 정치적·경제적 위상과 지난 50년간의 민주주의 발전을 고려하면, 과거 내란 사건의 형량을 12·3 내란 가담자들의 양형 기준으로 삼기 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지귀연·이현경 재판부는 비상계엄의 지속시간이 짧거나 치명적인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점 등 일부 사정을 유리한 정상으로 인정하면서도, 내란죄가 위험범이라는 점 등을 들어 제한적으로 반영하였다.

결론 (근거 수준: 강)
두 사건의 법원은 내란의 결과뿐 아니라 각 피고인의 지위와 역할, 사전 모의·준비, 구체적인 실행행위와 범행 이후의 태도 등을 개별적으로 고려하여 형을 정하였다. 5·18 사건에서는 대규모 인명 피해가 불리한 양형 사유로 반영된 반면, 12·3 사건의 재판부들은 사망자가 없고 단시간에 종료되었다는 결과를 유리한 사정으로 크게 반영하지 않았다. 다만 그 정도와 이유는 재판부에 따라 달랐다.
관련 자료

검증 결과

내란우두머리의 1심 선고형은 전두환 내란 사건이 더 높았다. 그러나 내란중요임무종사자들의 1심 선고형은 윤석열 내란 사건에서 전반적으로 더 높게 나타났다.


의견 비교

의견 1

계엄 관련 軍 사령관들 중형, 깊은 후유증 우려된다.

“비록 비상계엄이 헌법의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행위였다고 해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의 특수한 현실을 감안해 이들의 처벌 수위가 정해져야 한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법원은 이런 사정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상관의 명령이라고 해도 군인 역시 어떤 순간이든 헌법과 법률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긴급하게 들이닥친 상황은 머릿속 원칙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당시 군 지휘부에 대한 예외 없는 엄벌은 군에 깊은 후유증을 남길 수밖에 없다.”

관련 자료

의견 2

내란의 실패를 감경사유로 삼아서는 안 된다.

“내란범은 위험범이다. 결과발생이 범죄 성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처럼 내란범은 결과범이 아닌 위험범의 성격을 지닌 범죄인데도 내란 우두머리의 법정형은 사형, 무기징역이다. 그만큼 내란죄가 국가 존립 및 국민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매우 중한 범죄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내란이 실패했다는 것이 피고인들에 유리한 양형사유가 될 수 없다.”

관련 자료

의견 3

이런 정치군인 다신 없어야 한다.

“이들은 윤석열의 망상을 제지하기는커녕 12·12 군사반란 때 하나회가 그랬듯이 윤석열의 사병처럼 움직이며 내란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개인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군의 소명을 저버리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이들의 죄는 윤석열 못지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내란특검 구형량에 크게 못 미치는 1심 선고 형량은 결코 과하다고 볼 수 없다. 역사의 시계를 독재 시대로 되돌리려 한 무도한 정치군인들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이들을 엄히 단죄해 역사에 박제해야 마땅하다.”

관련 자료

의견 4

내란에 대한 단죄도 헌법원칙에 따라야 한다.

12·3 비상계엄 관련자들을 내란 혐의로 기소한 사건들에 대한 1심 판결은 두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첫째, 12·3 비상계엄과 그 실행행위가 형법상 내란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위헌적인 비상계엄이 국헌 문란의 목적과 폭동이라는 내란죄의 구성 요건을 충족하는지 논란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내란 사건을 심리한 1심 재판부들은 모두 내란죄의 성립을 인정했다. 상급심의 최종 판단은 지켜봐야 한다.

둘째, 내란에 가담한 피고인들에게 전반적으로 중형을 선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12·3 내란 사건의 형량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과거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사건을 비교하면 드러난다.

1996년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사건에서는 신군부 핵심 관계자 16명이 기소됐고, 1심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제외한 유죄 피고인들은 모두 징역 10년 이하를 선고받았다. 반면에 12·3 내란 사건에서는 더 많은 피고인이 내란죄로 기소됐고, 징역 10년 이상 형을 선고받은 피고인이 10명이 넘는다.

문제는 내란죄 판례가 많지 않고 구체적인 양형 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아 법관 재량이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진관 재판부는 12·3 내란을 ‘위로부터의 내란’으로 규정하고, 과거의 ‘아래로부터의 내란’보다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내란이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내란보다 본질적으로 더 위험하다는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이진관 재판부는 한덕수가 내란을 사전에 모의하거나 실행행위를 지휘하는 등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볼 자료가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이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에 초기부터 적극 가담한 ‘2인자’ 노태우에게 선고된 징역 22년6개월보다 무거운 형량이다.

12·3 내란을 사전에 모의하고 사후에 주도한 사람에 대해선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고, 그 책임 정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것 역시 헌정질서의 일부다. 내란에 대한 단죄도 헌법상 책임주의 원칙과 비례원칙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

관련 자료

업데이트 및 정정

2026-09-30

최초 발행 · 작성 문재완


2026-10-22

의견 추가